[명예기자] 도심의 정자 이휴정과 용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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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 명예기자 배재록

울산 남산루 아래, 태화로터리 서쪽에 도심의 정자 이휴정과 이예의 문묘를 모셨던 용연서원이 나란히 서있습니다. 울산 남구 신정1동 제일병원 인근 태화강변에 있는 고즈넉하고 고풍스러워 한국적인 정서가 많이 남아있는 준 문화재입니다.

이휴정은 정식 문화재에 지정되지 않았지만 울산광역시가 향토 문화 보존상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울산광역시 제1호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태화로터리에서 남산과 십리대밭이 있는 방향으로 진입해 남구 휴정길 20에 가면 용연서원과 나란히 서있는 이휴정이 마치 이조시대로 돌아간 듯 착각을 일으킵니다. 아니면 대로변에 걸려 있는 ‘이휴정’ 안내판을 보고 쉽게 찾아오는 방법도 있습니다. 밀집된 주택 사이로 용연서원과 이휴정 입간판을 달고 방문객들을 맞아줍니다.

울산의 용연동과 같은 한자라 기묘한 정서와 사유를 일으킵니다. 용연서원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추인문이 앞을 막아섭니다. 문을 이고 있는 지붕의 건축미가 도드라져 보이고, 유려한 필체의 현판이 살아 숨 쉬며 뭔가를 말할 듯 침묵하고 있습니다.

유서 깊은 서원이라 인문학적 소양을 불러옵니다. 역사적인 사연을 많이 가진 고택일수록 스토리텔링이 많았을 거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장 너머로 용연서원의 따뜻한 원목이 보였습니다. 대문을 열자 돌쩌귀가 돌아가는 소리가 귀곡 같았습니다.

용연서원은 학성이씨 시조인 학파 이예 선생의 문묘를 모셨던 곳입니다. 이예는 울산 관아의 아전 출신으로 조선 최초이자 빼어난 통신사였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사절로 파견된 사신입니다. 통신은 신의로 교류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국왕의 뜻을 일본에 전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울산이 낳은 이예 선생은 40여 차례 넘게 교토 등 일본에 파견되는 등 외교관으로 활약한 43년 간 667명의 조선인을 귀환시켰다고 했습니다.

용연서원은 2001년 3월 옛 용연사 터에 학성이씨 ‘월진문회’에서 이휴정과 함께 복원해 도심 속에서 과거와 만날 수 있는 역사의 보고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건물은 강당과 유생이 거처하며 글을 읽는 명성재와 온고재가 있었습니다. 동재인 명성재는 이예 선생의 홍보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서재인 온고재에는 서원 건립당시 발굴된 ‘학성 이천기 일가묘 출토복식’이 전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용연서원 담장 건너에 있는 정자인 이휴정의 단청이 두드러지게 아름다웠습니다. 전통적인 정자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 아름다운 전통건물이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휴정은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1호인 이 정자는 부지 1,445㎡에 연건평 95.76㎡ 쉼터인 정자입니다. 현재는 학성 이씨 월진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주변의 높은 건물에 막혀 태화강도 십리대숲도 볼 수 없지만 조선시대를 보는 듯했습니다.

지붕은 여덟 팔(八)자 모양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 익공집에 겹처마 집입니다. 부재와 건축 수법이 조선 후기 문루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는 울산도호부의 객관인 학성관의 남문루였습니다. 객사란 지방에 출장간 관리나 사신이 머물던 곳이며, 누각은 접대, 향연 및 의식 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입니다.

마당에 있는 성균관 생원이자 이휴정의 주인 이동영에 대한 약력 비석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는 조선 현종 때 문인이자 학성이씨 시조 학파 이예 후손으로 자는 화백, 호는 이휴정 입니다. 재예가 뛰어났으며 경사와 필법에도 통달하였고, 생원 시험에 급제했으나 33세로 요절 했습니다. 저서로는 ‘이휴정문집’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성균관에서 수학한 뒤 울산에 내려와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동영의 나이 28세에 태화강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은월봉 아래 정자를 짓고 은월봉과 태화강의 아름다운 정자라는 뜻으로 이미정(二美亭)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1664년 이곳에 들른 암행어사 박세연이 이곳에 들러 남긴 산수간에 머물면서 호탕하게 살았다는 휴산휴수(休山休水)라는 시를 듣고 정자의 현판을 이휴정으로 고쳤습니다.

이휴정 마당에 있는 대형 돌벼루는 이동영의 할아버지 이한남 때부터 내려오던 것으로 시회를 열 때 쓰던 것이라 합니다.

이휴정에는 이동영과 괴천 박창우의 진한 우정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박창우는 영천사람으로 이동영과 스승 허목에게 수학했습니다. 성균관에서 수학한 뒤 28세 때 울산으로 이사를 온 이동영이 박창우를 이주시킵니다.

박창우가 울산에 이사를 오자 그는 문이 6개나 되는 집과 곡식 살림살이를 지원했고, 그는 울산 송정마을 입향조가 됐습니다. 울산에 함께 살게 된 두 사람은 태화강에 배를 띄우고 시를 논하고 경승을 체험하며 풍류를 즐겼습니다.

그들의 일화를 알고 있는지 이휴정 건물 뒤에는 굽은 소나무와 경건한 배롱나무가 이휴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바라보는 대로 역사를 읊조려줄 듯했습니다.

태화루가 없어진 뒤 태화루라 불리기도 했던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도서관을 겸해 사용해 오다가 1940년에 울산초등학교 교정을 넓히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건물도 양쪽 칸을 막아 온돌방을 만듦으로써 문루를 정자 형식으로 바꾸었습니다. 내부로 드나들 수 있는 디딤돌이 향수를 부러 일으켰습니다.

이휴정은 많은 수난을 겪으며 2003년 9월 25일 화재로 한차례 더 전소되었고, 456백만원을 들여 복원했습니다. 2005년 6월 중건하여 2007년 10월 완료해 1940년 원형대로 복구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 때 이거정이 쓴 ‘태화루’ 현판은 현재 울산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복제 본을 온고재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이휴정 출입문인 경중문(景仲門)이 옛 사람들이 갈망했던 내일을 이야기 해주고 있었습니다. 도도히 흐르는 태화강물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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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1. 익명

    이조시대. 문묘. 문화재자료. 출토복식. 등 용어 이해 등에 문제가 있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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